[대덕단상]이제 일어서야할 때…구조조정 '신중히'
"정부 조급함, 과학자 불신 두 가지 족쇄부터 풀어야"

"우리 연구소 없어지는 건가요?"(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K 연구원) "우리 연구소 지식경제부로 가는 겁니까?"(한국원자력연구원 P 박사) 요즘 대덕의 연구자들 사이 가장 궁금한 질문들이다. 또 다시 과학기술계가 심란하다.

최근 대덕특구에서 과학기술계에 중요한 행사가 동시에 열렸다. 두 행사 모두 과학기술계에 큰 의미를 가졌지만, 분위기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7일 오전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에서 열린 대한민국 최초 UAE 원전 수출 및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 수출 축하 행사. 과학기술계의 원전 수출 일조를 자축하면서 과학기술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선배 과학자들의 노고에 눈시울을 적시며 다시 한 번 국가에 대한 헌신 의지를 불태웠다. 감동과 열정의 분위기였다.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는 희망의 교감들이 오갔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대덕인들의 다짐도 對 국민을 향해 선언했다.
 

<대덕특구인의 다짐>

첫째, 대덕특구인은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 5만달러 시대를 여는 주역임을 자임한다. 오늘의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을 이끌고 나아가 과학기술중심사회의 조기실현과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둘째, 우리는 지난 30여년간 축적된 우리나라 최대의 과학기술 메카로써 우리의 역량을 시장에 연계해 실질적인 국부를 창출하고 그 성과를 전국에 확산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셋째, 우리는 오늘 한국형 원전 수출 축하의 자리를 빌어 연구소, 산업계, 대학의 주체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국가 과학기술 사업화 성공과 제2·제3의 과학기술 세계화 성공모델 창출을 위해 일치 단결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같은 날 오전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열린 Arthur D Little(ADL) '산업기술연구회 소관 출연연 조직개선 방안 연구용역결과 공청회'. 이 곳에서는 과학기술인들의 분노와 원망이 쏟아졌다. '더이상 연구생활 못해먹겠다'며 부정적 언어들이 행사장을 메웠다.

출연연 통폐합을 논하는 찬바람이 현장 과학자들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연초부터 정부가 과학기술계 구조조정의 고삐를 당기고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계가 불안에 떨고 있다. 지식경제부 소속 출연연은 단일법인으로 통폐합하고, 교육과학기술부 소속은 새로 설립될 아시아기초과학연구원으로 재편될 양상이라서 현장 과학기술자들은 또 다시 구조조정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당장 외부 우수인재 채용부터 영향을 받을 것 같다고 아우성이다. 연구자들이 슬슬 연구는 뒤로 하고 자기 생존과 미래를 염려하는 대화가 많아지는 양상이다. 혹자는 이공계 기피 가속화를 논한다. 이번 출연연 구조조정을 놓고 현장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출연연 발전 방안을 논하는 자리에 500명 넘는 과학기술 인파가 모여 정부 지배구조 문제를 핏대를 세우며 비판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산업기술 출연연의 조직개선 방안을 연구한 ADL의 지적을 눈여겨 볼만하다.

ADL이 분석한 출연연 글로벌 경쟁력 수준 조사에 따르면 2000년 대비 2007년 위상이 떨어졌고, 투자대비 성과도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된 7대 핵심원인 중 대부분이 정부에 귀결된다고 ADL은 지적했다. 7대 핵심원인 내용은 이렇다.

▲범 정부 국가 연구개발 콘트롤 타워 기능 미흡 ▲정부의 인력·예산·평가권 보유 ▲정부의 對 출연연 전문성 미흡 ▲과도한 경쟁위주 정부 연구개발 예산 배분 시스템 ▲개별 법인 형태의 출연연 구조 ▲연구회 권한과 역할 제약 ▲형식적 출연금 연구개발 성과관리 등이다.

정부에 속하지 않은 원인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현장 불신의 핵심은 정부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정부가 과학기술을 미래지향적으로 투자하고 개선할 의지가 있는지 현장에서는 의구심이 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연연 통폐합 화두로 흔들기만 했지, 정작 실질적인 연구현장의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연연 과학자들이 무작정 변화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렇진 않아 보인다. 오히려 더 애원하는 느낌이 짙다.

자신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하루 빨리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길 염원하고 있다. 연구자들 스스로 연구소의 체질개선과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진정한 변화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느냐다. ADL은 그 열쇠를 정부가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ADL 측이 26억원 예산을 받아 출연연 조직개선 방안을 모색해보니 최종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 과학기술계 구조조정이란 화두가 떠오른 가운데, 진정한 변화 의지를 보이는 순서는 닭(정부)이 먼저일까, 달걀(과학기술계)이 먼저일까. 과학기술자들은 정부가 먼저 확실한 의지를 보이고 신뢰를 회복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는 닭이 먼저다.

◆ 연구성과 대박 원하나?…그 전에 풀어야 할 과학기술자 족쇄

ADL의 진단과 현장 과학자 의견을 종합해 보면 연구활동을 저해하는 지배구조의 근본적 원인들이 몇가지 떠오른다. 현장은 미래 거대 연구성과 창출을 아예 생각지도 못하게 만드는 족쇄들이 과학기술계에 묶여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와 연구현장간 구체적인 변화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나 공감대 없이 구조조정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현장에서는 출연연 통폐합 이전에 과학기술자들의 족쇄를 풀지 않고서는 영원한 2류 과학기술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행히 과학계를 발목잡은 요인들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현장에선 인식하고 있다. 국가 리더의 강력한 과학기술 애정, 정부·정책입안자들의 진정한 인식 변화와 의지가 있으면 쉽게 풀릴 수도 있는 문제로 여긴다. 그래서 과학기술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 조급함의 족쇄…"비전 키우며 기다려야"

대한민국 사람들은 빨리 빨리를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연구성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다급하다. 대표적 예로 새 정부 들어 연구과제 프로젝트 기간을 단축시켜 성과를 내는 '연구개발 속도전'이라는 정책이 진행됐다.

결과에 대한 현장 반응은? 역시 연구의 기본속성으로 귀결된다. 연구성과는 속도 보다 무수한 반복과 지겨운(?)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속성을 갖는다고 과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빨리 빨리 문화가 연구자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과학자들이 귀가 따갑도록 정책입안자들에게 하소연하지만 말이 안통한다. 짧게는 1년, 길게 2~3년 내 성과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 한 과학자는 "국민을 살찌울 연구성과가 1~2년 안에 나오면 우리나라는 벌써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한다.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CDMA와 최근 원자력연구원의 연구로 수출과 UAE 원전 수출 사례에서 보듯 연구에 대한 거대 파급효과를 보려면 최소 10년, 길게는 5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또 다른 연구성과 사례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두 사례가 미치는 국가경제 파급효과가 워낙 메가톤급이라서 그 자체로 대덕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대덕연구단지에 40년 가까이 30조원 넘게 투자했는데 내놓은 것이 뭐냐고 따지지만, 이제는 그런 비판이 무색해 졌다.

# 불신의 족쇄…왜 과학자들을 못믿나?

ADL은 발표현장에서 출연연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수치를 발표했다. 출연연 과학자들이 매일 평균 순수하게 연구하는 시간이 고작 2시간에 불과하다는 것.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적어도 10년 넘게 뿌리내렸다고 증언한다.

왜 과학자들이 연구를 못할까? 연구자들이 연구를 못한다는데 왜 쉽게 바뀌지 않는걸까? 문제의 핵심을 거슬로 올라가면 불신의 과학기술 행정 시스템이 문제다. 예산시스템을 보자. 과학자들이 연구 시간을 뺏기는 주 원인 PBS(Project Based on System). 정부의 인식으로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정부 부처로 보따리 장수처럼 움직인다.

특히 출연연의 거의 모든 예산 집행 권한을 정부가 쥐고 있다. 연구소 예산권을 기획예산처가 쥐고 흔드는 경우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인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T/O 늘리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정부의 조정을 받는다.

우수인재를 확보·선순환시키는 여건 역시 연구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다. 연구과제 선정이나 성과 평가방식에도 연구자들은 불만이 많다. 예산-인력-평가 등 과학기술 행정을 이루는 3대 핵심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첩경은 불신의 회복. 한마디로 연구현장은 '우리를 믿고 맡겨라'고 강조하고 있다.

현장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해 주고 책임을 맡기라는 뜻이다. 출연연 한 원로 과학자는 "과학자들은 순수하다. 우리가 열정을 갖는 핵심은 유별나고 물리적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국민과 정부의 신뢰와 인정이 있으면 된다"라며 "본격적인 글로벌 과학기술 경쟁 시대에 우리 과학기술계가 황금알을 또 낳을 수 있도록 비전을 품고 기다려 주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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