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고규홍 나무 전문 칼럼리스트

햇살이 따가워 하늘을 올려다본 눈가에는 주름이 잡힙니다. 편치 않게 이어지는 삶이라 해도 하루에 한번은 하늘을 바라보자고 늘 이야기합니다만, 어김없이 하늘 한번 쳐다보기도 수월치 않은 날은 있습니다. 바닷가에 면해있는 천리포수목원의 하늘은 물빛을 닮은 탓인지, 참 푸릅니다.

숲 안에 들어서 가만히 숨을 멈추고, 초록의 숲과 어우러진 코발트 빛 수목원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고해(苦海)처럼 이어지는 삶은 짧게나마 안식의 순간으로 바뀝니다. 수목원 숲을 산책하며, 큰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의 새살거림을 가만히 만져보고, 따가운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나는 작은 꽃들을 하나 둘 관찰하는 일은 그래서 참 행복한 일입니다.

수목원 뿐이겠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들어서서 긴 호흡으로 대기를 호흡하고, 그 나무 아래 파릇하게 솟아나는 작은 풀들의 아우성을 바라보는일이라면 어디라도 아름답지 않을 수 없겠지요.

▲노란 빛을 은은히 띤 흰 색의 꽃잎이 아름다운 붓순나무(Illicium religiosum)의 꽃. ⓒ2009 HelloDD.com

아름다운 숲길에 붓순나무(Illicium religiosum)가 있습니다. 별다를 것 없이 편안하게 생긴 늘푸른 잎의 나무인데, 4월 중순 쯤 꽃이 피었습니다. 한창 동백과 목련에 눈길을 빼앗기던 때이지요.

진도 완도 제주도 등 남해안의 해양성 기후에 어울리는 나무인데, 이곳 기후가 비교적 그 지역의 기후와 유사한 탓인지, 우리 수목원에서도 잘 자랍니다. 대개의 상록성 나무와 마찬가지로 도톰한 혁질(革質)로 돋아나는 붓순나무의 잎사귀는 양끝이 뾰족합니다. 새로 나는 순이 붓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붓순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잎겨드랑이에서 피어나는 꽃은 노란 빛을 은은히 띤 흰 색이지요. 제가끔 1센티미터 쯤 되는 열두 장의 꽃잎이 사진에서처럼 휘늘어지며 피어나고, 그 안쪽에 꽃술이 맺힙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하얀 꽃과 함께 상록성 나무 특유의 싱그러움이 느낄 수 있는 나무입니다.

▲한번 피어나면 오랫동안 꽃을 떨구지 않고 수목원 길을 환하게 밝히는 마취목(Pieris japonica 'Purity'). ⓒ2009 HelloDD.com

다시 길을 걸으면, 수목원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가운데, 마취목(Pieris japonica 'Purity')이 있습니다. 같은 과에 속하는 나무 가운데 우리 수목원이 보유하고 있는 식물도 종류가 참 많습니다. 전문가적인 관찰이 아니라도 구별할 수 있는 차이는 뚜렷합니다.

꽃의 생김새는 똑같이 앙증맞은데, 색깔이 조금씩 차이를 가진다는 겁니다. 순백의 하얀 색으로 꽃을 피우는 종류에서부터 연한 분홍색, 진보라색, 심지어 빨간 색의 꽃을 피우는 종류까지 있습니다. 이 나무의 꽃은 비교적 개화 시기가 길어서, 한번 피어나면 오랫동안 꽃을 떨구지 않고 수목원 길을 환하게 밝힙니다.

일본이 고향인 이 나무는 잎에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 독 성분을 짐승들이 먹게 되면 마비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 해맑은 꽃나무의 이름이 마취목인 것은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양한 종류의 마취목 꽃들을 한꺼번에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노란 색으로 봄을 알리는 황매화. ⓒ2009 HelloDD.com

노란 색으로 봄을 알리는 꽃들 가운데 황매화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황매화 가운데 재배종인 Kerria japonica 'Golden Guinea' 입니다. 꽃잎을 활짝 열기 전의 사진인데, 꽃잎을 활짝 펼치면, 다섯 장의 노란 꽃잎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닙니다.

꽃이 예뻐서 대개는 정원의 울타리에 관상용으로 심고 가꾸는 편입니다. 황매화는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지만, 자생지는 찾기 어렵고, 대개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관상용으로 심어 키우는 편입니다.

낮은키 나무인 황매화는 대개 울타리 주위에 줄지어 심어 키우는데, 우리 수목원에도 수목원 옆으로 난 도로 변 언덕 위의 담장 가까이에 이 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군락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만 어김없이 새 봄을 밝히며 노란 꽃을 피워올립니다.

▲팥알처럼 생긴 꽃이 조롱조롱 맺힌다 해서 팥꽃이라는 이름이 붙은 팥꽃나무(Daphne genkwa). ⓒ2009 HelloDD.com

봄볕이 조금씩 따갑게 느껴질 즈음이면 그 볕만큼 따스한 빛의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 가운데, 짙은 보랏빛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가 팥꽃나무(Daphne genkwa) 입니다. 키 작은 나무여서,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은데, 이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꽃을 피우는 때만큼은 주변의 어떤 나무에 뒤지지 않을 뛰어난 아름다움을 발산합니다. 멋진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팥알처럼 생긴 꽃이 조롱조롱 맺힌다 해서 팥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꽃 송이 하나하나는 꽤 작습니다. 넷으로 갈라진 꽃잎은 각각의 크기가 큰 것도 기껏해야 1센티미터도 안 되지요. 이 작은 꽃들이 가지 위에 숱하게 모여 피어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보라색 꽃방망이처럼 보입니다.

우리 수목원에서는 윈터가든의 볕이 가장 잘 드는 한가운데에 서있지요. 팥꽃나무의 화려한 꽃을 만나면, 보는 사람의 마음도 순간적으로 열정적으로 바뀌지 싶습니다.

▲꽃잎들이 낙화해 환상적인 꽃길을 만드는 겹벚꽃. ⓒ2009 HelloDD.com

천리포수목원에는 산책할 수 있는 여러 코스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매우 좁아서 여럿이 함께 걷기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큰연못에서부터 '소사나무집'이라고도 부르는 정자를 지나 '위성류집'이라 부르는 게스트하우스에 이르는 길이 가장 널찍한 길일 겁니다.

약간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길인데, 그 언덕 마루에서부터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특히 봄에 아름답습니다. 이미 제가 '나무 편지'를 통해서 말씀드리기도 한 길이지요. 봄이 아니라 해도 평안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길이건만, 봄에는 유난함이 덧붙여집니다.

바로 벚나무의 꽃잎이 우우 떨어져 환상적인 꽃길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이 길 가장자리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시는 분홍색 겹벚꽃이 있는데, 이 나무 전체에 환하게 피어났던 꽃잎들이 낙화하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꽃길이 되는 겁니다. 혹시라도 내년 봄에 천리포를 찾으신다면, 꼭 이 길을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북미 지역이 고향인 채진목(Amelanchier stolonifera). ⓒ2009 HelloDD.com

이 꽃은 북미 지역이 고향인 채진목(Amelanchier stolonifera)입니다. 채진목이라는 나무 가운데에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토종 채진목(Amelanchier asiatica)도 있습니다만, 이 나무는 북미산입니다. 4월 중순부터 하얀 색의 꽃을 피우는데, 가느다랗고 끝이 뾰족한 다섯 장의 꽃잎이 제가끔 1.5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피어나지요.

나무 전체에 하얀 꽃이 활짝 피어났을 때의 모습은 장관입니다. 꽃이 지고나서 여름 짙어지는 7월이면 채진목은 열매를 맺습니다. 짙은 보라색으로 맺히는 열매는 각각 1센티미터 크기로, 마치 작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바라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 열매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영양분도 풍부하다고 합니다. 단백질 칼륨 칼슘 마그네슘 아미노산 등 다양한 영양분이 있어서, 북미 지역에서는 건강식품이라든가 의약용품의 원료로 많이 활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철쭉이라고만 이야기하는 많은 종류의 나무 중 하나인 Rhododendron 'Copperman' . ⓒ2009 HelloDD.com

우리가 흔히 철쭉이라고만 이야기하는 나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위 사진은 그 가운데 하나인 Rhododendron 'Copperman' 입니다. 비전문가들인 우리로서는 그냥 '철쭉'이라고 부르면 되겠지만, 그 종류는 정말 많습니다. 이 종류의 나무들은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 대표적인 조경수여서, 식물학이나 조경학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모양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지난 봄 제 나무 이야기에는 진달래 이야기가 빠졌던 듯합니다. 꽃 피어나기 전에 흰진달래와 진달래의 꽃망울 이야기는 잠시 했습니다만, 들려드리고 싶은 진달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릴없이 내년 봄을 기다려야 하겠네요.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흐르는데, 쉼 없이 계속돼야 할 삶은 여전히 고단합니다. 눈 감고 천리포수목원의 꽃길을 그려본 건 잠시나마 삶의 평안 얻고자 한 까닭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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