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 가운데 ‘다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는 분들도 학창시절에는 많이 들어본 말일 것입니다. 이른바 ‘뭇매’를 뜻하는 비속어 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해 즐기는 게임의 경우 걸핏하면 ‘다구리’가 벌어집니다. 밉살스러운 행태를 보이거나 규칙을 어기는 플레이어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먼저 도태시키는 것이지요. 참여자 가운데 한 명이 ‘XXX(ID) 다구리’하는 메시지를 보내면 모두가 달려들어 한 사람을 떨구어냅니다.

‘놀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구리 당한다는 의미를 뼈저리게 느낄 만 합니다. 열세에 처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고통 입니다. 흠씬 맞고 난 뒤의 자신이 벌레 만도 못하게 널부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의 아픔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헌데 온라인 게임에서 다구리를 당하는 것은 단지 ‘미운 털이 박혀서’ 때문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게임을 하는 것이 엉성하거나 다른 모습을 보여 그게 눈에 거슬리면 다구리 대상으로 삼는 케이스가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게임을 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다구리의 위협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나마 게임은 장난 수준 입니다. 살벌하고 무자비한 다구리가 곳곳에서 발견 됩니다. 우리나라 특유의 게시판 문화, 그 익명성이란 벙커 속에 숨어 남들을 조롱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각박하고 몰인정한 사람들만이 몰려드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집단보다 훨씬 무서운 ‘다구리 꾼’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정신적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가 현각스님(푸른 눈의 이방인이지요)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스님의 말을 인용해 ‘(미국이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 참된 종교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제목을 달았더군요. 이 내용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논쟁’은 거의 없고 무차별 인신공격과 폭언이 도배질 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살생은 안 되니까, 뇌염모기 구제도 하덜 말어? 이걸 기사라고 쓰냐? 기자는 무슨 얼어죽을 기자? 플라스틱 머리지.”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이 뇌염모기란 뜻이냐?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겠어.” 대개의 싸움이 이런 식 입니다. 각각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대편의 특정 ‘사이버 논객’을 대상으로 융단폭격식 다구리 공세에 나섭니다. 아수라장 혼전이 벌어집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관심도 다르고 주의 주장도 천차만별 입니다. 옛 직장에 있을 때 자주 접했던 재미있는 사람들이 생각 납니다. 매일 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오늘 호외 나왔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있습니다. 이른바 ‘호외맨’으로 불립니다.

걸핏하면 “TV 프로그램이 틀렸다. 어떻게 책임 질거냐”며 따지던 ‘TV 아저씨’, “신문에 나온 운세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며 육두문자를 퍼붓던 ‘왕재수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온갖 생각이 비빔밥처럼 뒤섞여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측면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남의 사고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실상에서는 남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으니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은 ‘의사 소통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기업의 회의에 동석했다가 ‘온라인 난장판’에 버금가는 생생한 다구리 현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출발을 하더군요. 새로운 상품의 마케팅 방향을 놓고 브레인 스토밍을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많이 오갔습니다. 우스개 소리도 많이 나왔고, 격의 없는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진행자가 묵묵부답 앉아 있던 한 간부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냉소적인 웃음을 보이면서 “내가 뭘 알겠어요? 전문가들께서 알아서들 하시지요” 하고는 입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디어를 개진했던 일부 사람들이 애써 못들은 척 하면서 회의를 진행했으나, 그 간부의 웅얼거림이 다시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이거 애들 장난도 아니고…지들이 제대로 한 게 뭐가 있어?” 낮은 목소리였으나 모두에게 명백히 들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간부가 “할 말 있으면 똑똑히, 다 들리게 하라”고 소리치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불 붙었습니다. 냉소적인 간부가 ‘말만 요란한 사람들이 얼마나 일을 망쳐왔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소리를 질렀던 간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잘 한 게 뭐가 있느냐”는 식의 고성이 오가고 “나이도 어린 게 설치는 꼴이라니”라는 발언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회의의 처음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돌아가면서 냉소적인 간부 쪽으로 참석자들의 의견이 쏠리는 것이었습니다. 중재 끝에 계속 이어진 회의 후반부에서는 초기의 활발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간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측으로부터 뭇매를 맞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디어만 내면 사람들로부터 난도질을 당하는 모양이 가관입니다. 이따금 몇몇 사람의 말꼬리 잡기로 인해 회의 주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언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진행을 맡은 부사장이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다구리를 당한 간부는 중간에 나가 버리더군요.

결론 없는 회의가 끝난 뒤 부사장에게 넌지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저 사람들 왜 저래요? 원래부터 견원지간인 모양이지요?” 부사장 말씀. “뛰어난 사람들이지요. 다들 회사 잘 되게 하겠다고 하는 짓인데, 생각이 서로 다른 것 가지고 저렇게 물고 뜯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몇 번이나 화해를 시켰는데도 저 모양이라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얘기인즉슨, 일을 풀어가다 보니 몇몇 창업 공신들간의 의견이 다를 때가 간혹 있었는데, 그 때마다 벌였던 신경전이 마침내는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고 합니다. 한 쪽에서 새로운 방향을 들고 나오면 다른 쪽이 반대를 하고, 다시 그 반대논리가 개진되면서 엎치락 뒤치락이 된 꼴이지요.

다구리를 당하게 되면 누구나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리고 보복이 다시 그에 대한 보복을 부르지요. 상대방이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 되면 “그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하는 식으로 몰아 붙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내가 옳고 남이 그르기 때문에, 남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적으로 몰아 갑니다. 서로의 생각이 접점을 만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멀어진다면 결국에는 사람간에 묶여 있던 끈을 푸는 것은 물론, 대화단절의 벽을 높이 쌓습니다.

누군가가 밉게 보이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비를 만들어 내는 솜씨가 기를 질리게 할 정도 입니다. 본론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꼬투리 잡기와 비난을 위한 비난 일삼기가 판을 칩니다. 그래서 ‘감정의 골’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겠지요.

굳이 미움을 사지 않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회사의 장래와 새로운 도전기회에 대해 열정어린 발언을 하고 나면, “거 좋은 아이디어네. 당신이 나가서 직접 해보지 그래” 하는 투의 신경 긁기에서부터 “누가 그런 거 모르나. 우리 형편을 뻔히 알면서” 식의 허무감 조장, “잘났어 정말” 같은 냉소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구리가 쏟아집니다. ‘고수’ 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구리가 가혹해 집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간의 대화가 이런 지경이니, 쫓아가서 귀싸대기를 올려줄 수 없는 온라인 쪽 사정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기묘묘하며 예측을 불허하는 욕설이 횡행 합니다.

제가 자주 보는 모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게시판은 ‘다구리 판’으로 개칭을 해도 될 정도 입니다. ‘XX도 O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OO 들은 무인도로 보내서 그 위에 원폭을 투하해야 한다’ 는 등 욕질의 신기원을 여는 참여자들이 많습니다. 어떤 여성은 “군대에 간 남자 친구가 그러는데 속옷을 일주일에 한번 갈아 입을 정도로 청결에 신경 쓰기 어렵다고 그런다”는 내용의 의견을 올렸다가 “네까짓 것이 군대에 대해서 뭘 아느냐”, “정신대라도 있으면 잡아 넣어야 할 XX” 같은 심한 다구리를 당했습니다. 그 여성이 군대를 모욕한 것도 아니며, 전혀 악의를 담은 것도 아니지만 원수처럼 여겨진 모양입니다. 어쩌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게시물에 들어가서 대충 읽어 보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발견되기라도 하면 분노에 치를 떨며 다구리를 결심합니다. 심한 모욕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뉘앙스와 몇몇 표현에 발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정치 분야의 게시판이 ‘막 나가는 다구리 판’ 입니다. 정치인들이 누군가의 말꼬투리를 잡고 전후 사정은 거두절미한 채 선전선동에 열을 올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다 못한 사람이 비분강개, 운영자에게 간곡한 글을 올렸습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글을 신속히 삭제해 주십시오. 상습적으로 욕을 하는 회원을 견책 하십시오. 문학적 표현을 넘어 부모와 자식이 함께 읽기 부적합한 외설 표현을 하는 회원들에게 경고조치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 밑에 곧바로 다른 사람의 댓글이 붙더군요. “문학은 문학 코너 운영자에게 요청해야지, 여기는 정치 코너다”라고 말입니다. 짧은 글에서조차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분명코 아닐 것입니다. 비아냥의 가능성이 높겠지요.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면 별 일이 다 있는 것 아니겠느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이 의견을 주고 받는다는 모 사이트를 보아도 거친 욕설과 다구리가 심도 있는 이론과 버무려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단순한 에티켓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소통의 ‘기술 부족’으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의 시각에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관점에서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는지 부터 면밀하게 분석한 뒤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봅니다.

저쪽을 납득시키는 것을 애초에 포기한 채 강요만 한다면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경질적인 접근’은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쪽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논리가 엉성하다고 해서, 근거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교묘한 독설을 끼워 넣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바짝 약이 오르게 하는 다구리는 우리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저격수’를 표방하지만, 흥분한 상태에서의 공격은 ‘다구리’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힘있는 의사 개진은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의 또는 발표를 할 때, 논리나 근거에 빈틈이라도 드러난다면 경을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칭 ‘고수’들에게 허점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멸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 치 혀로 패가망신의 처참한 기분을 느끼도록 만드는데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 모 벤처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한 기업설명회에 구경을 갔다가 그런 고수들을 보았습니다. 벤처캐피털의 심사역들인데, 이날 따라 무척 날카로운 분들만 나온 모양입니다. 해당 기업 대표이사의 스타일이 뭉개지는 모습이, 구경꾼인 제가 보기에도 ‘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물어봐도 될 것을 가지고 번거롭게 말을 돌려가며 ‘반드시 타격을 주어야 겠다’는 신념을 관철시킵니다.

한 가지 질의 응답 표본을 봅시다. (심사역) “사장님, 올해 예상 매출이 어느 정도이지요?” (대표이사) “예. 80억원 입니다.” (심사역) “상반기 매출 실적은 어떤가요?” (대표이사) “30억원이 좀 안됩니다.” (심사역) “작년 초에 1차 투자를 얼마 정도, 어떤 조건에 받았나요?” (대표이사) “30억원을 20배수에 받았습니다.” (심사역) “그러면 작년에 투자를 유치할 때 제시했던 매출목표는 얼마였습니까?” (대표이사) “50억원 정도였습니다.” (심사역) “그래서 결국 작년 매출은 얼마였나요?” (대표이사) “28억원이었습니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못 미쳤는데, 그 이유는…” (심사역)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 사장은 지난해 매출이 부진했던 사연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논리를 준비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 심사역의 단호한 말투에 기가 질려 해명을 하지 못하고 설명회를 마쳐야 했습니다.

심사역의 논리 전개를 따르자면 그 회사는 ‘믿을 수 없는 기업’처럼 보여집니다. 의사소통이란 것은 이처럼 누군가의 작심에 따라 유도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뼈 있는 질문’이 몇 번 나오게 되면 프리젠테이션에서 좋은 비전을 보여주었던 회사의 모양새가 갑자기 초라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일부 투자자들이 그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공격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박함이 넘치는 질의를 보면서 ‘이거 완전히 다구리 아냐’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기업 활동이라는 게 항상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말입니다.

언제부터 우리 주위가 이처럼 전투적으로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청이나 토론의 문화보다는 냉소주의와 꼬투리 잡아 약 올리기 만이 서슬 퍼렇게 몰아 칩니다. 곳곳에 피가 흥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쟁적인 삶을 추구하는 듯 보입니다. 적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은 그나마 다행 입니다. 아예 본말을 파악도 하지 않으려는 조급함이 더욱 큰 문제 입니다.

다구리 과정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뭔가 수렴해 갈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좀 더 세련된 다구리를 위해 ‘적’의 주장과 의사를 신중하게 들은 뒤 거기에서 ‘뼈대’를 추려내는 ‘참을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의 아픈 곳을 마치 ‘핀’처럼 찔러주어야 제대로 다구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적도 그 다구리를 자기 발전을 위한 채찍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말입니다. 지엽말단적인 시비 걸기는 아무리 보아도 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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