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와이드 인터뷰]서정욱 전 과기부장관, 반성·분발 촉구

"과학기술행정 40주년에 한마디 하라니 그 동안 세금 내시느라 고생하신 국민 여러분께 우선 감사를 드리고, 그 많은 세금을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계가 제대로 써왔는지 묻고 싶다. 인생은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한다. 어떤 것에도 의혹되지 않는 삶. 완전한 삶 그것이 불혹이다. 그렇다면 과기행정도 불혹에 걸맞는 성찰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 그는 과기행정 40주년을 맞이하는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성찰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성찰은 과연 무엇일까.

서 전 장관은 "과기행정 40년을 회고하려면 학문적으로 정리가 돼 후학들이 보고 배우고 뉘우치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공치사의 나열이 아니라 신실한 자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홍보기사를 엮어 놓고는 백서(白書)나 과기행정 40년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이제까지 부끄러워서 숨긴 사실이라도 교훈으로 밝힐 때"라고 말했다.

◆ 과기행정 40주년…"가슴에 공명 일으킬 수 있는 성찰, 과연 누가 하고 있나"

서 전 장관은 "여기 저기서 '30년사'다 '50년사'다 과학기술 관련 책자를 많이 내는데, 자화자찬만 있고 감명을 받을 만한 성찰은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기록에도 침소봉대, 오류, 왜곡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패도 떳떳한 것은 교훈으로 삼고, 성공도 남의 것이라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 과학기술자의 도리가 아닌가. 잘못된 일은 제때에 뉘우치고, 성공한 일이라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얻은 결과인지 사실을 공명정대하게 사료(史料)로 집대성(集大成)하는 것이 과학기술의 정도(正道)"라고 했다.

아울러 "따져보면 전시로 끝난 유명무실한 연구개발 사업도 허다했다"며 '명'과 '실'을 상부(相符)시켜야 하는 과학기술자의 윤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서 전 장관은 "40년 전과 같을 수 없는 오늘의 과기행정이 과연 얼마나 진보했는지, 인원과 예산이 불어났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원망(願望)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는 정부대로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있을 테고, 대학과 연구소 또한 좀 더 잘 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라며 "잘한 것은 평가하고, 부실한 부분은 계속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 40년을 맞이하는 우리 과학기술계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소회를 피력했다.

그는 "앞으로 국민소득 수 만 불 시대를 구현해야 하는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무엇인가? 40년 전 시절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와 과학기술에 무관심한 세대가 공존하는 우리 현실에서 과학기술계, 특히 과기행정이 어떻게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력이 국가의 핵심 역량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과학기술만으로 한국의 미래를 대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서 전 장관은 "한국의 미래는 과학기술계 뿐만 아니라 교육계, 산업계, 정계, 사회경제계, 문예계 등 사회 각계가 모두 참여해 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 과기기술이 "제트 엔진을 프로펠러 동체에 단 격이 돼서는 안돼"

대학, 연구소, 기업의 경영진이 과기행정의 경직성을 서로 흉보면서 닮고 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면 과기행정도 참신해져야 한다. 연구현장의 과학기술자들이 아무리 우수해도 경영, 관리 또는 행정 환경이 그에 부응하지 않으면 구식 동체(胴體)에 신식 엔진을 달아놓는 것처럼 날지 못하는 비행체가 되기 쉽다.

서 전 장관은 "국책 연구개발사업은 고도의 투명성, 풍부한 지식과 경륜, 탁월한 기획 및 관리 능력을 갖춘 대학, 연구소, 기업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는가? 순환보직을 해야 되는 행정관리가 과학기술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꿈에서도 연구를 할 정도로 열정적인 과학기술자 중에서 자질과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발탁해 그 분야의 사업관리 전문가로 등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사람에게 계속성과 전문성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사업을 맡길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서 전 장관은 이어 "얼마 전 신문을 보니, IT관련 3대 국가 R&D 프로젝트라는 제목 아래 2010년까지 370조 국부창출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중에서 1984년에 TDX사업, 1993년에 CDMA사업을 맡아달라고 정부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업마다 6~7년이 걸렸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밤낮이 없었다. 연구나 사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비범한 협동정신을 발휘하니 사업은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성공했다. 성공한 요인은 무명의 젊은 영웅들의 희생적 헌신, 그리고 산하 연구소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다 불안해지자 외부 전문가에게 전권을 맡긴 당시 정부(체신부)의 과단성"이라며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2007 HelloDD.com
 

그는 "지난 40년을 회고하면 국민은 납세를 통해 수익성 높은 투자를 한 셈이고, KIST, ADD, KAIST 등을 창설하여 이공계 고등교육을 혁신하고 기업이 필요한 인력 및 지식 자원을 공급했으며, 3천2백여 억불의 수출을 할 만큼 산업의 고도화에 기여했다.

이제 과기행정은 '해야 할 일(what to do)'과 '해선 안될 일(not to do)'을 구분해야 한다. 특히 '해선 안될 일'에는 조직과 인력의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전 장관은 "이웃 일본을 보라. 지난 90년대를 마감하며 정부조직 및 국립연구소들의 구조조정을 했다. 우정성을 없애고, 대장성, 통산성, 방위청 등을 개편, 개칭하며, 과기청과 문부성을 통합하고 새로운 연구소를 여럿 만들었다. 일본이 과학기술, 교육, 산업, 정보통신이 중요하지 않아서, 그리고 국립연구소들의 실적이 없어 그랬을까? 사람이나 조직은 늙으면 생식능력을 잃고 퇴화하기 마련이고 성형수술을 한다고 체질까지 바꿀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 "과학기술계, 위키피디아적 발상이 필요하다"

위키피디아(Wikipedia)는 누구나 투고하고 편집에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다. 누구나 참여하기 때문에 내용이 산만해지고 왜곡될 우려도 있지만,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세계 사람들이 손쉽게 자료, 정보, 지식을 수시로 입력하고 수정함으로써 신뢰성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서 전 장관은 우리 과학기술계의 정보수집, 의견수렴, 사료집성(史料集成)에 위키피디아적 발상을 권고했다. 그는 "부분만 알고 있는 사람이 여럿 모이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며 "위키피디아식 사업관리를 했더라면 황우석 같은 사건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국가과학기술 투자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위키피디아적 발상은 국내외 동정, 미래 예측, 우선순위 결정, 전문가 발굴 등을 상시 공개적으로 수집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과학기술계에 자결권(自決權)을"

서 전 장관에 따르면 과학기술계에 시급한 것은 '자결권'이다. 자율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되, 연구의 목표, 진로, 그 사업관리까지 전문가 또는 전문가집단에 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대학이나 연구소를 찾아가 '당신과 같은 과학기술 전문가를 위해 이러한 연구사업을 기획하고, 이만한 예산을 확보했다. 넉넉지 않겠지만 납세자들의 요청이니 나라를 위해 사업을 맡아 달라'고 한다면 누가 마다하고 연구를 게을리 하겠는가?" 되물었다.

결국 과학기술자에게 긍지와 자결권을 함께 부여하는 과기행정 체제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공하지 못한 연구라도 다음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 서 전 장관은 "앞으로 과기행정이 주로 해야 할 일은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확보하며, 전문가를 찾아 사업을 맡기는 것이다. 과기행정이 사업 집행 및 관리까지 관여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를테면 KAIST가 총장을 유치할 때 노벨 수상자를 데려오라는 외부 입김 없이 스스로 문진(問診), 타진(打診), 청진(聽診)을 통해 선정했더라면 물의를 빚지 않았을 것이다. 각종 위원회도 행정실무자들의 수렴청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서 전 장관은 "40년 전의 한국과 오늘을 비교하면 모든 것에 격세지감이 든다"고 했다. 과학기술계는 어떤가? 요즘 과학기술계 R&D 예산이 10조나 된다는데, 이렇게 많은 연구비를 쓰는 대학이나 연구소들의 연구결과에 대하여 국내외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궁금해 했다.

그는 포항공대 BRIC사이트를 높이 평가했다. 과기행정도 40년이 되다보니 명암이 있을 것이다. 어두운 곳이 있다면 밝혀내야 한다. 과기행정이 '봉사'라는 초심을 잃고 복지부동하거나 타성화 된 것은 없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요즘 대학과 연구소들이 돈만 있으면 단숨에 세계 굴지의 랭킹에 들어간다고 모금에 나서고 있다. 교육, 연구, 기업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교육과 연구에 돈이 꼭 필요하지만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는 또 "우리 과학기술계는 인력 및 자질 부족을 개탄만 하지 말고, 평범한 사람들을 모아 비범한 일을 해내는 협동 환경, 다시 말해 과학기술자들이 보편적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비범한 발견과 발명을 창출해내는 학습 및 연구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과기행정, 현장체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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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전 장관은 이어 "안방에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 농사를 지으려면 논밭에 들어가야 하고, 비바람 불고, 천둥번개 치는 벌판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홍수, 태풍, 해충(害蟲), 해조(害鳥) 피해로 속이 타봐야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무실역행(務實力行) 없이 농사직설(農事直說)만 읽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과학기술의 연구개발도 농사에 못지않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험난하다. 현장체험 없이 학식(學識)만으로 연구나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늘의 축복과 시운도 따라야 한다"고 현장체험을 누차 강조했다.

그는 과기행정 담당 공무원들에게 "현장체험 없이 보고나 회의에 의존하다보면 오판, 낭비, 간섭을 하기 쉽다"며 "과기행정의 전문성은 훌륭한 정책을 세우고 필요한 자금(예산)을 확보하여 전문가들이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환경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 지속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역할

대국가의 선진화과정에 수반되는 환경오염, 에너지ㆍ물의 부족, 빈부격차, 난치병, 고령화 등 지구사회문제군(地球社會問題群)은 지구의 지속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과학기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과 공조해야 해결되는 21세기의 과제들이다.

특히 IT, BT, NT 분야의 발전은 사회적으로 순-역기능, 선-악순환을 예상하고 있다. 서 전 장관은 "이제 과학기술도 맹목적 수용이 아니라 논쟁의 대상으로서 현명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해야 한다"며 "과기행정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기행정은 과학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마음 편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 힘주어 말했다.

◆ 과학기술계, "40년 축적한 역량으로 자력갱생(自力更生)"

이제 화두는 '자력갱생(自力更生)'이라는 게 그의 생각.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연구기관이나 대학에 자율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자결권을 주어 새로 태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서 전 장관은 "정리할 것은 스스로 정리하고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도록 하는 것이 자력갱생"이라고 말한다. 40년 축적한 역량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되 성패의 책임도 함께 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구기관은 정부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는 "과기행정 40주년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과학기술계를 믿고 투자해주신 국민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정부도 과학자도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하고 협동하는 데 인색하지 말고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도록 새로운 40년을 설계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정부, 연구소, 대학, 기업 모두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과학기술계 전체가 지금을 대성찰(大省察)의 계기로 삼아 거듭 태어나 달라"고 당부했다.

대덕넷 특별취재팀 = joesmy@hellod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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