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서금영 과학전문 기자

화학의 발전은 연금술사의 공이 크다. 철이나 구리 등 값싼 금속으로 값비싼 금을 만드는 연금술은 수많은 과학자를 자극했다. 비록 연금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거나, 새로운 성질이 밝혀지기도 했다. 원래 물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질의 물질을 만든다는 점에서 연금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오늘날에도 연금술사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물론 값싼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 고대의 연금술은 아니다. 대신 플라스틱으로 금속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다. 이들이 만드는 것은 바로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이다.

전기에 감전되지 않도록 전선을 피복한 것이 플라스틱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로 들린다.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선 플라스틱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플라스틱이 세상에 나온 건 우습게도 당구공 제조업자들이 내건 상금 때문이다. 처음에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었지만 아프리카 코끼리가 급속히 줄자 상아의 값이 치솟았다. 그래서 미국 당구공 제조업자들은 상아를 대체할 물질을 찾기 위해 1만달러의 상금을 걸었다.

이에 미국인 하야트 형제가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장뇌(녹나무를 증류하면 나오는 고체 성분으로 화약과 방충제의 원료로 쓰임)를 섞어 천연수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플라스틱이었다.

초기 플라스틱은 단순히 분자 고리가 1만개 이상인 고분자에 불과했다. 그 뒤 석유로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다양한 플라스틱이 개발됐다. 이들은 마음대로 가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일상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가히 ‘플라스틱 혁명’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에 타기 쉽고, 수백 년 동안 썩지 않아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 플라스틱의 단점을 보완한 특수 플라스틱이 개발됐다. 기능성 고분자로 불리는 ‘제2의 플라스틱’ 혁명기를 맞이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항균이나 무염료 발색, 전자파 차폐, 냄새 제거 등 특수한 기능을 가진 플라스틱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속 성질의 플라스틱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1977년 일본 도쿄기술연구소의 시라카와 박사팀은 화학실험 중 반응촉매를 1000배나 넣는 실수를 했다. 뜻밖에도 반응용액의 표면에 찬란한 은색 광택의 고분자 박막이 생겼다. 시라카와 박사팀이 찾던 순수한 트랜스(trans) 형태주1)의 ‘폴리아세틸렌’이 만들어진 것이다. 폴리아세틸렌은 오래전부터 과학자들 사이에 전기전도성을 지닐 가능성이 높은 물질로 지목돼 왔었다. 때마침 일본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에 참석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화학과 앨런 맥디아미드 교수가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맥디아미드 교수는 물리학자 앨런 히거 교수와 함께 같은 주제로 연구 중이었다.

이후 세 사람은 공동연구로 폴리아세틸렌에 요오드를 입히면 전기전도도가 무려 10억배나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 고분자 물질인 플라스틱에 전기가 흐른다는 얘기다. 이들은 이 공로로 2000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전기가 흐른다는 것은 물체에 전자를 전달하는 ‘캐리어’(carrier)가 있다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캐리어가 들뜬 전자뿐인 줄 알지만 전자가 비워진 공간도 캐리어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탄소원자는 결합할 수 있는 4개의 손을 가졌다. 폴리아세틸렌의 탄소원자는 다른 탄소 2개와 수소 1개와 결합하고, 1개의 손이 빈다. 따라서 이 비어있는 손에 전자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전기가 흐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라카와 교수 등이 개발한 플라스틱은 전기는 흘렀지만 공기 중에 노출시키면 쉽게 부식돼 제품으로 만들 수 없었다. 또 ‘전도성 고분자’지만 금속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금속은 전기전도도가 온도에 비례해 증가하는 반면 시라카와 교수 등이 개발한 고분자는 온도가 낮아지면 어느 정도 전기전도도가 낮아지다가 일정 온도를 기점으로 다시 증가하는 특이한 성질을 보였다. 따라서 전도성 고분자에 전기가 흐르는 메커니즘에 대한 논란은 30년 넘게 야기돼 이를 응용하려는 학자들에게 걸림돌로 작용돼 왔다.

이때 한국인 과학자가 명쾌한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이광희 부산대 교수팀과 이석현 아주대 교수팀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물에서 고분자를 합성하는 기존 방법 대신 물과 기름을 함께 섞어 합성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폴리아닐린’이란 전도성 고분자를 개발했다.

기존의 전도성 고분자 합성법은 물에서 고분자를 합성해 분자 덩어리가 무작위로 붙어 순도가 떨어졌다. 분자를 사람으로 비유하면 마치 (머리-다리)-(배-머리)-(다리-발목)처럼 순서와 방향 없이 붙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인 연구팀은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현상을 이용해 분자가 잘 정렬되는 ‘자기안정화 기법’을 개발했다. 따라서 분자가 (머리-다리)-(머리-다리)-(머리-다리)처럼 가지런히 정렬돼 순도가 높아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폴리아닐린은 폴리아세틸렌보다 월등히 높은 전기전도도를 보였다. 또 전도성 고분자로는 최초로 온도가 낮아짐에 따라 전기저항도 낮아지는 금속의 특성을 보여줬다.

이로서 30년 넘게 지속된 금속이냐 아니냐는 논쟁은 한국인 과학자에 의해 마침표를 찍게 됐다. 연금술사처럼 플라스틱으로 금속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결과는 지난해 ‘네이처’지에 실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제 머지않아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의 개발로 그동안 금속으로 만들었던 모든 전기·전자 기기들을 대체할 수 있게 됐다.

플라스틱은 가볍고, 외부충격에도 강하며, 마음대로 성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음대로 휘어지는 플라스틱 디스플레이, 속까지 다 비치는 진정한 투명 전자제품, 기존의 1/10도 안되는 무게의 전자파 차단장치 등 그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이제 ‘제2의 플라스틱 혁명’을 넘어 ‘제3의 플라스틱 혁명’을 기대해 본다.

주1 트랜스 형태 : 트랜스(trans)는 사물의 성질이나 위치가 바뀌거나 엇갈려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다. 반면 시스(cis)는 사물의 성질이나 위치가 같은 편에 달린 상태를 뜻한다. 같은 분자식을 가진 물질도 트랜스 형태와 시스 형태로 두가지로 존재할 수 있다. 불순한 고분자는 트랜스와 시스 형태가 혼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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