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진서 정보분석센터 선임연구원

◆ 미래 지향적 기획을 위한 소고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연구개발 운영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연구기획과 평가 기능의 취약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평가는 연구개발성과평가법 도입, 기획예산처의 공공기관 혁신평가 등으로 개선의 기미가 다소 엿보이는 것 같지만, 평가 결과의 반영 정도는 속시원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하물며 연구기획을 강화하기 위한 뾰족한 수단을 모색하기란 더욱 힘든 것 같다.

지난 5년간 출연(연)의 평가 내용을 살펴보면, 연구기획 강화라는 지적사항이 매년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기획의 체계와 내용을 강화해야 한다는 일반론부터 국내외 동향 및 수요의 전략적 분석을 강화하고 국가 정책 및 타 연구주체와의 연계를 통해 출연(연)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평가의견들이 반복되고 있다.

마치 전년도 기관평가 의견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매년 비슷한 평가의견에 깜짝 놀라게 되고,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할 기획과 평가의 연결 고리 부재에 또 다시 놀라게 된다.

◆ 연구기획, 논란중에 '중요성' 부각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보고된 주요 안건에서도 연구기획의 문제와 그 중요성이 매년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의 비효율성이 일정 부분 기획 단계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체계적인 연구개발사업 기획체제 마련 필요', '연구기획 기간을 확대하여 기획의 충실도 제고', '전략적 기획 및 조정 기능의 강화', '핵심기술분야별로 상시적인 분석·검토체제 구축', '연구개발 정책 의사결정을 위한 분석역량 강화' 등에 의한 연구기획 강화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2004년 감사원 자료에서도 우리나라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연구기획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에 대한 사전심의가 미흡해 중복투자가 발생할 여지가 있고, 과학기술예측, 기술수준평가, 과학기술기본계획이 상호 연계되지 않아 기술의 수요와 발전추세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며, 연구계획서 응모기간이 지나치게 짧아 연구기획에 참여한 사람에게 오히려 과제 발주가 집중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추진되는 일부 신규 사업은 기획에 소요되는 시간이 평균 3~4개월에 불과하였고, 기획에 들어간 비용 또한 360만원~900만원에 불과하였다. 이 자료만 본다면 마치 근검절약 정신에 투철한 1960년대식 새마을운동의 속도전을 보는 듯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연구기획의 현실이었다.

과학기술 부총리제의 도입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기능 강화를 통해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기획기능의 부재'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푼 것은 사실이다. 기대에 부응하듯이 정부는 기획과 평가를 강화하기 위한 많은 정책적 노력을 쏟아왔다. 그럼에도 연구현장, 특히 출연(연)에서 느끼는 체감 정책은 과거에 비해 그리 나아져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평가'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인적·물적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과부하'로 작용하고 있으며, 연구원들이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기획 및 행정 '양식'과 씨름하느라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현장에서 이런 저런 각종 기획, 평가, 행정 양식에 혀를 내두르며 연구를 뒷전에 미룰 수밖에 없는 일선 연구자들은 그래도 '기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06년에 KISTI가 수행한 설문조사는 연구자들이 R&D 과정에서 연구기획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일선 연구자들은 연구개발성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연구비와 연구장비의 확보 등 예산증가가 요구되는 항목(17%, 2순위)보다 '독창적인 연구아이템의 선정'(46%, 1순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연구목표 및 기간 등의 적절한 계획 수립'을 3순위로 꼽고 있다. 출연(연)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유사하게 '연구목표·기간의 적절한 계획 수립'(30%, 1순위), '독창적 아이템 선정'(28.2%, 2순위)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응답하였다.

특히 연구기획의 문제점 중에서 '촉박한 일정(28.2%)'을 1순위로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기획과 행정에 대해서는 그 시간이 아깝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연구기획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기획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투자가 아깝지 않다는 점은, 지금의 기획방식에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일선 연구자들은 기획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기획방식을 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절차'와 '상징'으로서의 '기획' 뛰어넘기

우리는 이미 과학기술 관련 기본계획에서부터 추진계획, 시행계획, 발전계획, 후속조치계획, 평가계획, 관리계획 등 그야말로 기획활동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기획활동'이 혹시라도 기획을 위한 기획으로서 절차적 정당성이란 면죄부를 주기 위한 형식적 수단에 그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일부에서 거론하고 있다.

일선의 연구자들과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많은 기획(안)들이 누가 언제 어떤 논의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길이 망막할 때가 있다. 점점 화려해지는 공청회 초대장과 달력을 가득 채운 행사 일정, 끊임없이 쏟아지는 보도자료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다. 보통 합리성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연구 기획이 실질적인 내용의 개선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엇인가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연 현재 수립하고 있는 '기획'이 이와 같이 단지 '상징'으로만 활용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지 냉철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주기적으로 내용이 되풀이되는 일부 기획(안)을 볼 때면, 그리고 사후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기 힘든 마치 '나 이렇게 하리다'라는 의지를 담은 '결의문'과 유사한 수많은 기획 관련 보도자료를 볼 때마다 이런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기획이 일종의 이벤트로 변모하는 듯한 느낌은 필자만의 과대망상일까? 개미처럼 차근차근 긴 호흡을 하면서 '기획'을 해도 겨울나기에 부족할 판인데, 지금의 '기획'이 베짱이가 개미를 흉내내기 위해 동원한 일종의 '소품'은 아닐까? 절차와 상징의 이벤트로서 기획이 아닌, 미래를 준비하는 일련의 체계적인 활동으로서 기획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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