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하수지열연구부 이성곤 선임연구원

 

2년 전 여름. 나는 처와 세 돌인 딸아이 그리고, 막 돌이 지난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흔히 이민가방이라 일컫는 큰 가방 6개, 그보다는 작지만 만만치 않은 가방 2개 ,어깨엔 3.4 kg 노트북 컴퓨터와 기저귀 가방, 그리고 두 아이들을 실은 유모차.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을 가지고 여행길에 오르던 내 가족의 모습이다.

그래도 잃은 물건 없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한 것을 생각해 보면 가끔 내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다. 연구원 입사 후 3년 만에 해외에서의 생활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삼수 끝에 운 좋게도 한국과학재단 박사 후 해외 연수 지원 사업에 합격한 것이다.

연구원의 배려로 1년 더 연장해서 2년을 머물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연구원은 ‘목적 지향적’ 조직 개편을 시작하고 있었고, 난 지열자원연구팀에 소속된 직후였다. 마무리도 못하고 하던 모든 일을 구 탐사개발연구부 동료 및 선후배 연구원들께 다 떠맡기고, 새로 소속된 지열자원연구팀과는 상견례만 마치고 단 하나의 연구 사업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마운 또, 미안한 마음을 안고 떠났었다.

나와 우리가족이 머문 곳은 200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며 많이 알려졌던 유타(Utah) 주의 솔트레이크 시티(Salt Lake City)였다. 우리에게는 빙상 쇼트 트랙의 김동성 선수가 미국 오노 선수의 지능적인 반칙으로 울분을 토한 아쉬움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낮은 범죄 율,높은 문화수준, 풍부한 야외 여가시설, 비교적 저렴한 생활비 등으로 1999년에는 북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 된 곳이기도 하다.

칼 말론과 존 스탁턴의 유타 재즈(Utah Jazz) 때문에 이미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리라. 또한 비교적 친절하고, 순박하고,다산(多産)을 미덕(美德)으로 삼는 말일성도 사람들의 도시, 록키(Rocky) 산맥에 가지 쳐 나온 와사치(Wasatch)산맥 사이에 넓게 펼쳐진 해발 1300m의 고원 도시, 5월까지도 눈이 오고 10월하부터 다시 눈이 날리는 도시. 비키니 수영복 입고 스키를 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한 여름 땡볕에도 저 멀리 보이는 산에는 하얀 눈이 존재하는 도시, 대염호(Great of Utah)를 바다로 생각해서인지 특히나 갈매기가 많은 도시, 그런 도시이다.

유타대학교(University of Utah)는 1850년에 설립된 주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주립대학교이다. 말일성도 신자들이 유타주 솔트레이크에 정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만든 것 중의 하나라 한다. 우리네 대학 같이 울타리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실 어디까지 학교 캠퍼스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들은 바로는 1,500에이커의 면적으로 대략 한국에서는 꽤 크다는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의 약 6배 정도라 하며 대략 300여개의 건물이 있다고 한다.

캠퍼스 내에는 산학 연구의 결정체인 연구공원(Research Park)을 비롯하여, 미술관, 자연사박물관, 수목원, 정규 라디오 방송국 등이 있으며, 곳곳에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9홀 규모의 퍼블릭 골프 코스, 미식축구 경기장 등 많은 운동 시설도 캠퍼스 내에 있으며, 특히, 솔트레이크 시티 중심부인 물몬 사원으로부터 동쪽 방향 산 쪽에 위치하고 있어 캠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솔트레이크 시티 야경은 정말 아름답다.

또한, 인터넷을 세계 최초로 공동 개발한 학교, 인공심장을 최초로 이식 수술에 성공한 학교라는 자부심 이외에 의대, 응용공학, 컴퓨터 사이언스, 재료공학과,GIS, 광산공학과 등은 세계적인 수준이라 한다. 내가 해외연수로 2년간 몸담았던 CEM(Consortium of Electromagnetic Modeling and inversion) 연구팀은 기업 컨소시엄의 지원을 받는 지질/지구물리학과에 소속된 연구 조직이다. 매년 3월 초, 이때가 이 연구팀에게는 가장 바쁜 시기이다. 참여기업 관계자를 초청하여 컨소시엄 미팅을 개최하기 때문이다.

이 미팅에서는 이전 년도에 연구한 내용을 모든 석, 박사 과정 학생, 박사 후 연구원 등이 각자 발표를 하고 그에 따른 연구 성과물도 기업에 배포한다. 참여인원이 모두 30여명 내외의 소규모 미팅기기는 하지만 보통 학회 발표 준비보다도 더 정성을 쏟는다. 1월부터 3월까지 우리끼리 모여서 하는 발표 리허설도 1인당 3-4번 정도, 논문집에 실릴 논문도 거의 4-5번씩 지도 교수와 주고받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래서 정규 학회지에 바로 투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논문집을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컨소시엄 미팅에서 그 해 기업들이 컨소시엄에 참여할지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연구실 총 연구비가 결정되기 때문인 듯하다.

2년 동안 두 번의 컨소시엄 미팅에 참가하며 그래도 여기에 머무르며 가장 배우고 싶고 존경스러운 것이 있었다면 내 연수지도 교수의 일에 대한 열정이었다. 사실 말이 쉽지 그 자신도 연구와 발표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약 15편 정도의 논문을 가지고 연구원들과 1:1로 토론하며 발표자료 까지 일일이 체크한다는 것은-아니 거의 같이 만드는 것이다-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년간의 외출을 마치고 연구원에 다시 출근하던 첫날. 연구원 정문을 통고하면서 이상하리만큼 연구원이 낯설게 느껴졌다.

2년 전의 내 머리 속의 기억과는 뭔가 다른, 조금 과장하면 혹시 내가 연구원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정문 앞에 붙은 우수기관 선정 플래카드. 전에는 평가 결과가 뭐였었지 하는 잠깐의 딴 생각 뒤로 이전보다 유난히 좁아 보이는 잔디밭, 그 너머 신축 중인 건물. 조금 더 지나자 다시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

나중에 알고 보니 제2연구동이라 한다. '아니 많이 변했네. 진짜. 아 그리고, 이젠 자리도 다 바뀌었다던데...' 나의 연구실로 가는 길. 복도에 단정하게 걸린 연구 성과 게시물들. 연구실 내 자리에 놓인 매우 현대적으로 바뀐 책상과 의자. 출장 갈 것 같아 등산화를 찾으러 간 옛 우리 연구실 창고는 멋있는 세미나실로 바뀌어 있었다. 새 모습을 한 테니스장, 농구장이며 또 새로 생긴 헬스장, 그리고 골프 연습장까지. KIGAM Office에 가끔씩 들어와 게시판을 엿본 내 지식으로는 그 변화를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하긴 나에게 가끔씩 연구원 소식을 전해주던 그 게시판도 이젠 보기 좋은 새것으로 바뀌었으니... 하나하나씩 생각해 보면 작은 변화이지만, 2년 만에 모든 것을 한 번에 접하는 나에게는 짧은 것 같지만 또 매우 긴 2년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가 유타 대학교에서 적응하며 그곳에서 생활하는 그 시간에도 우리 연구원은 쉬지 않고 변하고 있었으리라.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던가. 내가 없던 2년 동안 연구원의 달라진 모습. 뭐라고 정확히 말하긴 힘들지만 이전보다 잘 짜여진 더 나은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또 이러한 변화 때문에 내가 우리 연구원에 대해 이전보다 자부심을 갖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변화를 만들기 위해 연구원에 계신 많은 분들이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특히 내가 연수를 1년 더 연장하는데 있어 바쁜 와중에도 나의 빈 자리를 메워주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우리 지열자원연구실의 가족들에게 많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전날의 실 환영 회식 때문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날 아침, 모르면 또 가르쳐주면 되지 하고 마음먹으며 "지질자원연구원이요" 라고만 짧게 이야기 했다. "네"라는 짧은 대답 밖에는 없었다. ‘어, 이전에는 카이스트 기숙사 가는 길로(어쩌고저쩌고).

조금은 설명이 필요 했었는데...' 이것도 나만의 느낌일까? ※ 이 콘텐츠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저작권을 갖고 있습니다. 지질자원연과 본지의 허가 없이 이 내용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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