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의 과학향기] 글 : 유상연 과학칼럼리스트

'지문(紙紋)'이 문서위조를 막는 새로운 수단으로 제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종이에 있는 고유한 무늬를 진위의 식별방식으로 이용하자'며 런던 임페리얼 대학의 나노테크놀로지 교수 러셀 코번(Russell Cowburn)가 제안한 이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원리는 이렇다. 종이표면을 확대해 보면 울퉁불퉁한 한데, 여기에 레이저를 쪼인다. 그러면 레이저 빛이 종이표면과 충돌해 분산되면서 밝은 표면과 어두운 '얼룩(Speckles)'으로 이뤄진 무늬를 만들어 내는데, 스캐너가 이 무늬를 디지털로 저장하자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문을 저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의 지문(指紋)이 전세계에 꼭 하나만 있고 그 모양이 일평생 변하지 않듯이 종이도 그렇다는 점이다. 꼭 같은 공장에서 나온 종이나 플라스틱 물질이라도 표면의 울퉁불퉁한 모양이 크게 다르다. 종이나 플라스틱의 표면은 수백 나노미터 크기의 다양한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렇게 미세한 크기의 굴곡을 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과학자들의 의견이다.

더구나 종이나 플라스틱의 표면을 짓누르거나 물에 적시더라도 나노 크기의 얼룩을 식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장점도 있다. 네이처에 소개된 코번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섭씨 180도에서 30분 동안 열에 노출되거나 거친 표면의 청소 패드로 문지르고, 심지어 검은색 마커펜으로 휘갈겨 칠하는 등 오리지널 물질의 표면을 크게 손상시켜도 ‘종이 지문’의 패턴을 인식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코번교수는 '앞으로 모든 여권이나 운전면허, 출생증명서 등을 발행할 때 ‘종이지문’을 스캔해 저장하자'고 주장한다. 국경 검문소나 경찰서에서는 필드 스캐너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문서의 표면무늬를 판독한 다음, 이를 원본 데이터베이스와 대조를 하면 위조 여부가 쉽게 판독된다는 것이다.

만약 코번 교수의 주장대로 된다면 아주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요즘은 컬러 스캐너와 프린터 기술의 발달로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등을 위조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위조 방법도 단순한 복사의 수준을 뛰어넘어 글자를 특수한 화학약품으로 지워 다른 글자를 대신 써넣거나 기존의 글씨체에 덧칠을 하여 글자를 바꾸는 등 다양해지고 있다.

이렇게 위조된 문서를 감정해달라는 의뢰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하루에도 20여 건씩 접수된다고 한다. 당연히 정부도 위조범들과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위조를 막기 위해 나온 방법가운데 가장 고전적인 형태가 바로 워터마킹이다.

만원짜리 지폐를 불빛에 비추어 보면 세종대왕의 그림이 희미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방법으로 일반인들도 눈으로도 손쉽게 위폐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원래 워터마크란 용어는 '젖어있는 상태에서 마크'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 지폐의 앞면과 뒷면을 붙이기 바로 전에 젖어있는 지폐의 앞면과 뒷면 사이에 세종대왕의 사진을 인쇄해 넣은 것이다.

이 방식은 확실히 효율적이긴 하지만 비용부담이 크기 때문에 화폐 이외의 다른 문서에 적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워터마킹이 2차원 적인 형태의 위조 방지 기술이었다면 빛의 간섭현상을 이용한 3차원 홀로그램 시스템도 개발됐다.

즉 원본임을 확인하는 고유 마크의 평면적 모양 뿐만 아니라 입체 영상까지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 위조를 방지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홀로그램 기술을 발전시켜 개인의 서명을 3차원 필적 경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위조를 방지하는 기술까지 개발 되었다.

이 외에도 여권과 같은 주요한 서류는 아예 전파식별칩(RFID Chips)를 부착해 위조를 원천적으로 막아보자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실제로 미 국무부는 인증되지 않은 태그판독을 막기 위해 새로운 여권 내부를 금속물질로 만들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는데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

위조를 막는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되기 싶고 자칫 오용될 경우 첨단기술 절도범이나 ID 도난범,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의 목표물이 되기 싶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코번교수가 제안한 '종이 지문'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물론 가야 할 길은 멀다. 필드 스캐너의 보급가격이야 다량으로 만들면 코번교수의 주장대로 1천 달러 이내에 제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본DB와 접속하기 위한 네트워크 환경이 갖춰져야 하고, 방대한 양의 '종이지문'을 저장하기 위한 DB구축 등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망은 밝은 편이다.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거나 유통시킬 우려가 없다는 이 점이 있는데다, 정보통신망이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보통신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먼저 도입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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