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원자력연구원 연구원으로 생활정보지 창시자이자 ´교차로´를 통해 일약 성공시대를 열었던 박권현 회장이 11일 생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교차시켰다. 46세의 짧은 생이었다. 원자력 연구원에서 생활정보지 경영자로 변신한 박회장은 퓨전 인물이었다.

누가 뭐래도 언론계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지역사회에 아쉬움을 남겼다. 심장마비라는 공식적인 사인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그의 행보를 들면서 정치적인 좌절과 내부갈등에 따른 옥고등이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박회장은 1997년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핵연료 설계를 마치고 시제품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바로 옆에다 두고 전국을 뒤진적이 있다˝ 며 ˝바로 이런 것이 정보 단절에 따른 결과였다˝고 생활정보지 창간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지역신문의 광고분야 중 이른바 조각 광고만을 별도로 모아 만든 교차로는 엄청난 속도로 서민생활에 파고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살아있는 정보를 제공하게된 교차로는 기존 신문 광고시장을 파고 드는 한편 중개인을 축으로 거래가 일반화됐던 부동산 매매를 생활정보지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들로부터 집단적인 저항을 받기도 했다. 오늘 날 지방신문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틈새시장을 노려 파고 든 교차로의 광고시장 전략의 성공도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박회장은 1955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73년 서울대 공대를 거쳐 아주공대를 졸업했다. 83년 프랑스 푸아티에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에 이어 한국원자력 연구소 핵연료 설계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교차로 창간은 유학 시절 외국에서 일반화된 생활정보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구상해왔다. 1989년 7월에 출범한 이 사업은 초창기부터 순풍을 타기 시작해 1996년 7월부터 국제교차로를 만들어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 교차로는 대전지역에서는 매일 1백40면씩 주6회씩 발행하고 있으며 전국 70개 도시에 가맹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박회장에게 양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해 내부적인 갈등으로 불거져 나온 공금횡령문제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16대 총선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꿈을 접어야 하는 좌절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박회장은 생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초기에 부동산 업계와 중고 자동차 매매업계등에서 조직적인 저항과 위협이 있었고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신문의 탄생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엄청나게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흔 여섯으로 생을 마감한 박회장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으로 엇갈리고 있으나 지역 사회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박회장의 발인은 13일 오전 10시 성심병원 장례식장에서 있으며 장지는 공주 장기면 금암리 대전공원묘원이다.

<디트뉴스24 김중규 기자 · iot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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